임진왜란 때 나라를 분연히 앞장섰던 승병대장 사명대사의 구국의지를 기리기 위해
조선조 선조대왕은 명을 내렸다.
『사명대사에 고향에 전각을 세우고 그곳에 스님의 진영을 봉안하여
훗날까지 스님의 충혼을 모시도록 해라.』
임금의 명이 떨어지자 사명대사의 출생지인 경남 밀양군 무안면 산강리에는 사당이 세워지고
스님의 영정이 봉안됐으며, 선조는 이 전각을 「표충사」라 사액했다.
『누구든 이 표충사 근처를 어지럽히거나 신성시 하지 않을시는 엄히 다스리도록 하라.』
친히 사액한 선조는 고을 원에게 이처럼 신신당부하여 사명 스님의 호국정신을 치하했다.
 표충사 전경 |
그로부터 관료는 말할 것도 없고
백설들까지도 그 사당 앞을 지날 때는
늘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를 올렸다.
그렇게 백 여 년의 세월이 흘러 당우가 퇴락하자
사명 스님의 5대 법손인 남봉선사는
표충사를 중수하는 동시에 스님의 공적을 기리는
표충비를 세웠다.
때는 영조 14년, 1738년이었다.
표충비를 세울 돌을 고르기 위해 경상도 경산까지 가서 높이 3.9m, 폭 97cm, 두께 70cm 크기의
돌을 구해온 남봉 스님은 당시 정승 이익현에게 비문을 부탁했다.
『내 본시 승려의 부탁으로 글짓는 것을 즐기지 않았으나 오직 대사님의 사정이 간절하여
이를 물리치기 어려워 특례로 곧 비에 글월을 새기는 것입니다.』
배불숭유 정책으로 불교를 탄압했던 당시의 정승 역시
사명대사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외면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표충비가 세워지고 다시 백 년 후, 그러니까 조선 제24대 헌종 5년(1839),
사명대사의 8대 법손인 월파선사는 표충사를 밀양 영정사로 옮기고 절 이름을「표충사」로 바꿨다.
표충서원을 옮겨 가자 사명 스님의 고향엔 표충비만 남게 됐다.
지방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어 지난날의 역사를 말해 주고 있는 이 비석은
현재 몸체에 금이 간 채 비각 안에 세워져 있다.
 표충비각 |
비석 몸체에 금이 간 것은 일제 때였다.
사명대사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떠는 일본 사람들은
잔꾀를 냈다.
『저 비석은 보기만 해도 왠지 섬뜩하단 말이야.
마치 사명대사 귀신이라도 담긴 것만 같으니
무슨 방법을 쓰는 것이 어떻겠소?』
『좋소. 나도 동감입니다.
저 비석 옆에다 담배 창고를 옮겨 짓도록 합시다.』
일본인들이 사명대사의 혈맥을 끊기 위해 비석 옆에다 창고를 세우던 날이었다.
비석은 마치 살아있는 듯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한동안 못 견딜 정도로 몸부림치니 비석 몸체에 마치 피를 흘리는 듯한 형상으로 「쫙」금이 갔다.
일본 사람들이 표충비를 무서워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물론 임진왜란 때 왜구를 물리친 용맹스런 승장의 비라는 점도 없지 않으나
마치 스님의 구국혼이 비석에 어린 듯 나라에 큰일이 일어날 때면
비석에서 땀이 흐른다는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진 것이다.
예전 것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고
비석이 세워진 후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땀을 흘렸다는 첫기록은
1894년 갑오경장이 일어나기 7일 전으로 되어 있다.
비석이 있는 곳을 지나던 한 아낙은
매서운 겨울 날씨인데도 비석 몸체에서 땀이 흐르듯 물기가 흐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낙은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집에 도착하자마자 남편에게 말했다.
남편 역시 가만히 두고만 볼 일이 아니다 싶어 관가로 달려가 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