ㅅ ㅏ 찰

2026년 5월 7일 목요일 (서울 성북동 길상사 다녀옴 )

0 즐거운 인생 0 2026. 5. 7. 19:31

서울 성북동 삼악산 길상사 일주문 이 보인다 안으로 들어가서 우측엔 그리 크진 않지만 주차장이 있다 

 



 
1932년 전남 해남군에서 박재철(朴在喆)이라는 이름의 아이 가 태어났다. 평범하게 살았던 이 아이는 1950년 일어난
한국 전쟁을 계기로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진지한 고민에 빠졌다.

그가 떠난 세상에서 지금 살고 있는 우리는 그를 본명 ‘박재철’ 보다는 법명으로 기억하고 있다. 바로 우리에게 ‘무소유

(無所有)의 가치를 남기고 몸소 실천하며 살아가신 법정(法頂)스님이다.

1998년 법정은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 길상사(吉祥寺)를 열었 다. 길상사를 연 후에도 법정은 강원도 오두막에서 살면서 매년 봄과 가을 정기법회 때에만 길상사로 돌아와서 법문을 설파했다.

위 오두막은 내 친구가 살았던 집이다. 폐암판정을 받은 법정 은 2009년 봄 정기법회를 마지막으로 2010년 길상사에서 수 많은 신도들과 승려들의 애도 속에서 향년 77세로 세상을 떠났다.

법정이 문을 열었던 길상사는 원래 ‘대원각’이란 이름의 요정 (料亭)이었다. 요정은 기생을 두고 술과 요리를 파는

음식점을 의미하는데, 조선의 기생문화와 일본의 접대문화가 합쳐진 것이다.

대원각의 주인은 김영한(1916~1999)으로 15살에 시집을 갔지만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나, 먹고 살기위해 기생이 됬다. 뛰어난 미모에 문학과 음악에 재능까지 겸비,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어느 날 그녀의 인생을 바꾼 남자가 나타났다. 시인이자 교사 였던 백석(1912~1996)이란 이름의 남자였고, 서로 한 눈에 반한 두 사람은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을 만큼 뜨겁게 사랑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들의 사랑을 비난하며 인정하지 않았 다. 해방과 분단, 한국 전쟁으로 인해 이별할 수밖에 없었다.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한 백석과 북쪽으로 올라가지 못한 그녀다.

 

음력 (4월 8일 부처님 오신날 다가오니 마당 사칠 주의에 오색등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이 시기엔 어느 사찰을 가던지  색색 등이 걸려있는 게 보인다 

                                                            관세음보살 상 아래 설명서가 잘 나와있다

                                                    길상사도 거대한 쇠종이 매달려 있는 모습

한쪽 화단에 홀로 앉아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걸까
조계종 길상사는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고 생각보다 작은 사찰이다
이곳은 스님들이 공부하며 수행하는 곳
진영각은 생전에 법정스님이 쓰시던 유품과 사진 도장 글 쓴 종이가 유품으로 전시가 됐는데 아쉽게도 사진촬영금지구역이다 ㅠㅠ

 

진영각 내에 는 스님의 유품 과 작은 화단에 스님 유골 을 모신곳이다 우축에는 독활 땅두릅?

진영각 내 에 있는 작은 화단에  스님의 유골을  모신곳이라다  숙연에 진다  명복을 빕니다 __("")__

진영각 밖의 건물 모습  관광객들이  유품을 구경하는데   사진은 촬영금지라서  아쉽지만  ..유품들은 사진을 담을수가 없다 ................

진영각 들어가는 돌 계단 입구  안으로 들어가면 우측 담아래에 스님의 유골을 모신곳을  팻말만 꼽혀있다 ..

진영각 올라가는 계단 에도 온통 양쪽엔 온통 사월초파일 다가오니 오색등 을 매달아 놓았다

■ 한 여인의 사랑이 만든 절, 길상사

 

서울 성북구 성북동 삼각산 자락에는 길상사가 있다.

1997년에 창건된, 젊은 사찰이다.

원래는 군사정권 시절 이름난 요정이었다.

요정 대원각을 운영하던 기생 출신 김영한(1916~1999)이 시주해 사찰이 됐다.

길상사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김영한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양반가의 자제였으나 조실부모했고,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15살에 결혼했지만 이듬해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자유를 찾아 기생이 됐다.

금하 하규일의 문하에 들어가 궁중 아악과 가무를 배우며 ‘진향’이라는 이름의 기생이 됐다.

1935년 조선어학회 회원이던 해관 신윤국(신현보)의 후원으로 일본에 가서 공부했다.

해관이 투옥되자 귀국해 그가 갇힌 함경남도 함흥으로 가 면회를 시도했지만 허락되지 않았다.

결국 그곳에 머물게 됐다.

은인인 해관을 만나기 위해 다시 기생이 됐다.

함흥에서 가장 큰 요릿집인 함흥관에 나간 첫날, 김영한(당시 20세)은 시인 백석(당시 24세)과 기생과 손님으로 만났다.

당시 백석은 함흥 영생여고보 교사였다.

백석은 사랑의 징표로 ‘자야(子夜)’라는 아명을 지어줬다.

자야는 전쟁터에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마음을 달빛과 다듬이 소리로 그려낸, 당나라 시인 이백의 「자야오가(子夜吳歌)」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백석은 1912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조만식 선생이 교장으로 있던 시절 오산고보를 졸업했다.

이후 일본 아오야마가쿠인 대학을 졸업했고, 조선일보 기자를 거쳐 함흥 영생여고보 영어 교사로 재직했다.

백석의 부모는 아들이 권번 출신 여성과 지내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백석은 김영한에게 함께 만주로 떠나자고 제안했지만, 김영한은 이를 거절했다.

결국 백석은 홀로 떠났다.

그때 남긴 시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다.

눈은 푹푹 나리고 /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6·25전쟁이 발발했고,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 못했다.

이후 김영한은 중앙대학교 영어영문과에 입학했다.

백석의 삶을 따라가기로 마음먹은 듯하다.

졸업 후 「백석, 내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내 사랑 백석」 등의 책을 펴냈다.

김영한은 사업적 수완도 뛰어났다.

현재의 길상사 자리에 있던 한식당 청암정을 사들여 고급 요정 대원각을 만들었다.

대지 2만㎡(7,000평), 한옥 40여 채 규모였다.

김영한은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법정 스님을 찾아가 대원각을 시주하겠다고 제안했다.

당시 대원각의 가치는 1000억 원이 넘었다.

법정 스님은 처음에는 이를 정중히 거절했다.

그러나 김영한은 약 10년 동안 끊임없이 간청했고, 결국 법정 스님은 그 뜻을 받아들였다.

김영한은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받았다.

길상화는 ‘불길한 것을 깨뜨리고 길상한 것을 이루는 꽃’이라는 뜻이다.

대원각은 길상사로 다시 태어났다.

1999년 김영한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화장되어 길상사 뒤뜰에 뿌려졌다.

사람들이 “아깝지 않느냐”고 묻자, 김영한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1000억 원이라는 돈은 그 사람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

법정 스님이 말한 무소유란, 불필요한 것을 가지려 애쓰지 않는 삶이다.

김영한에게는 백석을 제외한 모든 것이 무소유의 대상이었는지도 모른다.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에서 성북 마을버스02번을 타고 길상사에 내린다.

일주문에 들어선다.

사찰에서 일주문은 세속과 진리의 세계를 가르는 경계다.

‘삼각산 길상사’라 적힌 일주문을 지나는 순간, 문밖과 문안은 전혀 다른 세상인 듯 구분된다.

깔끔하게 늘어선 한옥과 북한산에서 내려오는 계곡, 수많은 나무들 속에서 깊은 자연의 별서에 온 듯한 기분이 든다.

단청을 하지 않은 팔작지붕의 전통 한옥, 극락전이 나타난다.

관음전 왼쪽에는 1.8m 크기의 화강암 석상이 눈에 들어온다.

관세음보살상인데, 성모 마리아를 닮았다.

생각에 잠긴 듯 살짝 감은 눈과 목 주변의 둥근 띠는 미륵반가사유상의 모습과도 닮아 있다.

계곡을 따라 오른다.

고풍스러운 다리를 건너면 작은 사당이 보인다.

사당 앞에는 공덕비 하나가 서 있다.

시주자 길상화 김영한의 공덕비다.

작은 오두막 같은 집들이 곳곳에 있는데, 수행 정진하는 스님들의 처소라고 한다.

계곡 맨 위 조금 비탈진 곳에 법정 스님이 머물다 입적한 진영각이 있다.

진영각 내부에는 스님의 영정과 스님이 남긴 수많은 저서, 평소 쓰던 검박한 유품들이 전시돼 있다.

특히, 누더기처럼 해진 법복은 스님의 무소유 정신을 보여준다.

길상사를 창건한 뒤에도 법정 스님은 강원도의 오두막에서 지내며, 봄과 가을 정기법회 때만 이곳으로 돌아와 법문을 했다.

폐암 판정을 받은 법정 스님은 2010년 길상사에서, 수많은 신도와 승려들의 애도 속에 향년 77세로 세상을 떠났다.

진영각 담장 아래에는 스님의 유골이 모셔져 있다.

사람들은 손을 모아 합장을 한다.

일주문 쪽으로 내려오다 맨 오른편으로 향하면 7층 석탑이 보인다.

사자 네 마리가 받치고 있는 형상으로, 두 마리는 입을 다물고 두 마리는 입을 벌리고 있다.

영안모자 백성학 회장이 김영한과 법정 스님의 뜻을 기리기 위해 기증한 탑으로, 길상사와 성북성당, 덕수교회가 함께한 종교 간 교류의 의미를 담고 있다.

길상사에서는 생각이 깊어지고, 머리가 맑아진다.

#길상사 #김영한 #백석 #법정

 

 

실내는 사진 촬영 금지라 해서 문이 열렸길래 촬영
길상사 칠층석탑
이 큰 종은 왜 걸어놓지 않고 땅 바닥에 두는 것일까 ??
사진 촬영 금지 ㅠㅠ
지장전 계단 다 올라가면 스님이 공 ? 들고 서 있는 모습
이층에서 내려다 보니 영가들의 등 색은 횐색이란다
아래서 이층을 향해 촬영 모습 의 지 장 전

아래서 지장전 위로 보고 촬영 모습  1층에는 식당이 있어서 점심 공양은 비빕밥을 맛나게 먹고 왔다 ㅎㅎㅎ맛 최고

돌에 새겨진 그림은 석가모니 물을 뿌려주면 사진이 더 선명한데 얼마나 오랜 역사 가 되였을까
길상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 말사이다